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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탐방] 미처 피기도 전에 시든 단종의 애화
    여기 저기 2020. 8. 8. 14:25

     



     

                                  

               [역사 탐방] 미처 피기도 전에 시든 단종의 애화 

                                                사진*편집/죽암 장석대.

      

                                      단종은 조선왕조 제4대 세종대왕의 長孫이다.            즉 세종대왕의 長男 문종(文宗)과 며느리 현덕왕후(顯德王后) 사이에서 태어났다. 

              몸이 허약했던 제5대 왕 문종은 왕 위에 오른지 불과 2년4개월만에 39세로 승하 하였고,

                            단종의 생모(현덕왕후)마저 산후병으로 이틀만에 승하 하였으니,

              단종을 지켜 줄 울타리가 없어 권좌에 눈이 먼

    삼촌 수양대군에게 사사당하고 말았다. 

                       

                                                         

    ▲ 영월 冬乙旨山 기슭에 있는 莊陵(제6대 단종) 

     

     

     





     

      어릴 때 홍위(弘暐)라 불리던 단종은 8세 때인 1448년(세종 30년)왕세손으로 책봉되
      었고, 1450년 아버지 문종이 왕 위에 오르자 다시 왕세자로 책봉, 문종이 자신의 병세

      를 짐작하고 어린 세자를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에게 왕자의 보필을

      부탁하고 승하 하였으니, 단종이 보령 12세에 즉위할 수 밖에 없었다.
                  

     

                          ▲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동서300척, 남북490척 공간에만 생활제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 다고 한다. 처음에는 晉平大君이었으나 咸平大君, 晉陽大君, 세종 27년에는 다시 首陽大君으로 고쳤 니 권좌의 야욕은 짐작할 것이다.

     

    세종 때 佛書를 번역하고 향악의 악보를 정리했으며, 문종 2년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 왔던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의 병세가 위독하고 단종의 나이 어림을 알고 야욕은 점점 불타올랐다. 1453년(단종 1년) 10월10일 수양대군은 심복인 권람(權擥) 한명(韓明澮) 등과 결탁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문종으로부터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 병조판서조극관(趙克寬), 이조판서 閔伸, 우찬정 이양(李穰) 등 반대파들이 安平大君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는 이유로 죽이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이튼날인10월11일에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대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으니, 이것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단종은 이러한 수양대군에 밀려 왕위를 물려주고 허수아비 격인 上王이 되어 壽康宮에 옮겨 살았다.    

     


                                              ▲  단종이 소나무에 올라 서울쪽을 봤다는 관음송(觀音松)이다.

     

            원손 단종을 지켜달라는 세종과 문종의 유언에 따른 성삼문을 비롯 몇몇 문신과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등 무신들이 어린 왕을 복귀시키고자 모의했는데, 그 계획이 실행에 옮기기       전 김질(金瓆)의 밀고로 실패하고, 1457년 6월 단종을 魯山君으로 강봉하여 3면이 깊은 강물      둘러 싸인 영월 청령포로 귀양보냈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의 동서 300척, 남북 490척 공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는
    데, 그해 홍수로 청령포가 물에 잠겨 처소를 영월읍 永興里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겼다. 관풍헌 동쪽에는 매죽루(梅竹樓)가 있었는데, 단종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이 누각에 자주 올라 子規詩를 읊었다고 하여 子規樓란 이름으로 바꿨다.

     

     





      

              端宗의 子規詩

     

                             


         ▒피 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血淚春谷落花紅)▒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弧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假面夜夜眼無假(가면야야안무가)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聲斷哮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血流春谷洛花紅(혈류춘곡낙화홍)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何奈愁人耳獨聽(하나수인이독청)   

                

                                         -해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멘다.              밤이 가도 밤이 와도 잠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두견새 소리 그친 새벽 묏무리에 달빛만 희고               피눈물 흘러서 봄 골짜기엔 꽃만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끊는 하소연 어이 못듣고

                  어찌하여 무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들리는고.

                          
     

                      ※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애처로움과 비통함이 절절이 묘사 돼

                      있어

    읽는 이의 마음을 애처럽게 한다.                 

     

     

                           

     






             단종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단종은 영월에서 유폐생활을 하는 동안 이처럼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달래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9월 경상도 順興에 유배되었던 錦城大君(세종대왕의 여섯 째아들)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나서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봉 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세조가 후환을 없애고자 사약을 내렸다.   왕명을 받고 내려온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은 사약을 갖고 단종의 거처인 관풍헌에 당  도했으나 사약을 받어라는 말을 차마 못 했다고 한다. 이때 공생(貢生) 福得이란 자가 단

      종의 뒤에서 활 시위로 목을 졸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니 1457년10월24일이었다.

       단종이 숨을 거두자 시신은 東江에 내버려졌고, 후한이 두려워 아무도 손을 데는 사람이   없었는데,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寧越戶長) 嚴興道가 캄캄한 밤중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동을지산(東乙旨山) 기슭에 암매장했던 것이 오늘의 영월장릉

      (莊陵)이다.      


     

     


     

     

     

                                         ▲ 사진으로나마 두 내외분을 가까이 모셔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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